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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청] 일동면 역사문화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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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포천센터 작성일18-03-16 14:39 조회3,4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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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면 역사문화탐방


조선시대 영평현 동쪽에 있다 하여 동면이라 부르다 1895년(고종 32) 영평현이 포천군에 병합되며 동면을 둘로 나뉘며 일동면이 되었다. 문화 유적으로는 수입리에 청동기 시대 유적인 고인돌이 있고, 양사언 선생 묘와 그를 배향한 길명사, 철종 때 재상 김흥근 선생 묘가 있다.

○ 영의정 우복당(愚伏堂) 류전(柳琠) 선생 신도비
 

 
▲우복당 류전 선생 신도비ⓒ시민기자 이화준

일동터널을 지나 길명리 양사언 선생 묘를 찾아가는 길에 류전 선생 신도비를 군부대 정문에서 만났다. 

류전(1531~1589) 선생은 조선 중기의 명신으로 자는 극후(克厚), 호는 우복당이고 본관은 문화, 포천 자작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의정공 류예선으로 부모에게 지극한 효도를 하고 5형제의 우애가 돈독하여 독특한 효우정려와 비를 받은 류인선(자작동 역사문화탐방에서 소개)의 아우이자, 한음 이덕형의 어머니인 문화 류씨의 아버지이다. 즉 류전 선생은 한음 이덕형의 외숙이 된다. 

선생은 1552년(명종7)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8) 23세 때 별시 문과에 1556년(명종11) 26세 때 중시 문과에 또 급제하였다. 1565년(명종20) 종3품 사헌부 집의(오늘날 대검찰청 국장급)가 되었는데, 요승 보우(普雨)가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많은 횡포와 피해를 끼침으로 보우를 탄핵하여 제주도에 귀양 보내게 하였다. 1566년(명종21) 사간원 사간(왕에게 바른말로 간하고 관리들의 잘못을 탄핵하는 임무)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남용하고 사리사욕으로 부정을 자행하므로 그를 탄핵하였다. 결국, 윤원형은 삭탈관직이 되었으며 재산을 몰수당하고 귀양을 갔다가 죽었다. 1576년(선조9) 병조참판 겸 도총부 부총관(전군의 부책임자), 1577년(선조10) 사헌부 대사헌(오늘날 검찰총장), 1579년(선조12) 정2품 자헌대부에 승차하여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580년(선조13) 호서지방에 소요가 일어나자 선생을 충청 관찰사로 임명하여 난을 수습하였고, 1585년(선조18) 우의정에 오르고 1588년(선조21)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좌의정이 되고 이해 영의정에 올랐다. 

1589년(선조22) 정여립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지만, 11월 피로가 겹쳐 운명하면서 별세하였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선조가 “대신이 죽으니 놀람과 슬픔을 이길 수 없다. 역적을 국문하며 국사를 위해 애쓴 바가 많았는데, 이제 그를 잃음으로써 나의 팔다리를 잃었으니 아픈 마음 이길 수 없구나!” 하며 몹시 슬퍼하였다고 한다. 벼슬에 있던 38년간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동서 어느 붕당에도 가담치 않고 국정을 잘 이끌어 나갔다.
소흘읍 향적산에 안장하였다가 일동면 길명리 금주산에 이장하였고, 평난공신 시녕부원군(平難功臣 始寧府院君)에 추봉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생의 묘는 신도비가 있는 군부대 안에 자리하고 있기에 방문허가를 받아야만 갈 수 있다.

○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선생 묘와 길명사
 
 
▲양사언 선생 묘ⓒ시민기자 이화준


양사언(1517~1584) 선생의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돈녕주부 양희수의 아들로 천주산 아래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하였다. 

1540년(중종35) 유명한 단사부(丹砂賦)를 지어 성균관 진사에 뽑혔으나, 연이은 부모상으로 6년간을 시묘하고 1546년(명종1)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삼등, 함흥, 평창, 강릉 4읍의 부사를 역임하였고, 내직으로 성균관 사성, 종부시정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회양부사, 철원군수가 되었다. 1556년(명종11) 금강산 만폭동 돌에 봉래풍악(蓬萊楓岳) 원화동천(元化洞天) 여덟 자를 큰 글씨로 새겼는데, 고운 최치원 선생의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 쓴 글씨보다 나으면 낫지 못 미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1577년(선조10) 안변부사가 되었는데 풍속이 거칠고 까다로워 교화에 주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함경 관찰사가 조정에 상주하여 당상관 정삼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차하였다.
 

 
▲양사언 선생을 배향하는 길명사ⓒ시민기자 이화준


선생은 큰 난이 날것을 예견하여 안변성 주변에 큰 연못을 파고 물을 넣어 성의 방비를 두텁게 하고 마초(馬草)를 많이 비축하여 두었다. 그다음 해에 여진족이 난을 일으키자 신립, 신성절 장군을 파병하였는데 선생이 비축한 물자로 인해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 후 선생의 관할 구역 내에 있는 지능(智陵: 이성계의 증조부 익조의 능)의 화재로 해서(海西)로 귀양 갔다가 풀릴 무렵에 서거하니 향년 68세였다. 그해 선생이 사시던 곳 일동면 길명리 금주산에 안장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남사고(南師古)에게 수학하여 1583년(선조16) 여진난과 1592년(선조25) 임진란, 1607년(선조40) 누루하치 난을 예측한 선견지명이 있었다. 또 글씨는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한호(한석봉), 김구(金絿)와 함께 4대 서예가로 불렸으며 해서, 초서, 모두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작품 “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로 잘 알려져 있으며, 포천의 영평팔경인 금수정을 비롯한 곳곳에 선생의 일화, 시, 서, 암각문이 있다. 선생을 기리기 위해 길명리 산 175-1 길명사(吉明祠)에 배향하며, 음력 9월 16일에 제향하고 있다.
 

 
▲금수정 풍경에 매료되어 남긴 ‘경도(지상낙원을 뜻하며, 북경 서편 북해공원에 있는 황제 궁원의 돌섬이다)’ 암각문, 출처: 포천 역사문화관


○ 기산리 느티나무 보호수
 

 
▲느티나무 보호수ⓒ시민기자 이화준


기산리 253번지에 위치한 260년 된 느티나무이다. 조선시대 중엽 이 마을을 지나던 고승 한 분이 “마을 앞에 정자나무를 심은 뒤 정성껏 가꾸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면 마을 백성들이 평안히 자자손손 번성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황해도 장연 현감을 지낸 심정서 선생이 낙향한 후 마을 앞에 느티나무를 심고 정성 들여 가꾸고 치성을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 이 마을에는 재앙이 없어졌고 그의 아들 심무택 선생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청 호위 별장을 지냈다. 이후 집안 대대로 무관을 배출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 운담영당
 

 
▲중암 김선생 유허비ⓒ시민기자 이화준


김평묵(金平默, 1819~1891)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菴), 본관은 청풍이다. 중종 때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를 제창하던 김식(金湜)과 효종 때 영의정을 역임하고 대동법을 시행한 잠곡 김육(潛谷 金堉)의 후손으로, 포천시 가산면 가산리 시우촌에서 출생하였다.

5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6세 때 십구사략을 읽었고 8세 때 소학을 읽었다. 1842년 24세 때 당대의 대학자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였으며 최익현, 유중교, 유인석, 유기일 등과 같이 위정척사사상의 실천가가 되어 의병 활동의 전개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최선봉에서 활약하였다. 

선생은 1864년(고종 1) 유중교와 함께 『송원화동합편강목(삼강오륜의 강목으로 제천 자양영당에 보관)』을 편수하였고, 1876년(고종 13) 1월에는 일본과 조약 체결을 반대하기 위해 홍재구·윤정구·유인석 등의 청으로 척화 상소의 초고를 지었다. 60세 되던 1878년(고종 15) 5월 경기 어사가 학행으로 천거하여 다음 해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81년(고종 18) 2월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유포한 것을 비판하며, 척양(斥洋)·척왜(斥倭) 상소를 올렸으나 전라도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1884년(고종 21) 임오군란으로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났다.
 

 
▲운담영당ⓒ시민기자 이화준


68세가 되도록 학문만을 알며 나라와 겨레만을 위하여 몸을 바쳐 활동하였기에 제자들이 포천군 일동면 운담에 집 한 채를 지어 운담정사(雲潭精舍)라 이름하고 이곳으로 이사토록 하였다. 1891년(고종 28) 12월 20일 73세를 일기로 운담정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날 따라 바람이 몹시 불고 종일토록 눈이 내려 석 자나 쌓였다고 한다. 3개월 후 전국 사림장으로 백운산 다목동에 장사 지냈고, 나라에서는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다. 제자와 사람들이 운담정사 자리에 영당을 세우고 주자, 송시열, 이항로선생을 함께 배향하고 제향을 받들어 오다가 6ㆍ25사변으로 소실되었다. 1993년 8월 포천유림이 운담영당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999년 10월 현 운담영당을 복원하고 향화를 다시 받들게 되었다. 제향은 매년 음력 3월 10일이다.

○ 수입리 지석묘

 
▲수입리 지석묘ⓒ시민기자 이화준


수입리 지석묘는 탁자식 고인돌로 지석묘를 세우는 과정에 마귀 할머니가 머리와 두 손으로 돌을 옮겨 만들었다는 노고 설화(老姑說話)가 전해진다. 또한 ‘괸돌’ 또는 ‘아양 바위[앵 바위]’라고 부르고 있어, 우리의 전통적인 믿음 체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덮개돌의 상면에는 지름 10㎝, 깊이 3.5㎝ 정도의 알 구멍이 1개 확인되며, 알 구멍과 유사한 10개의 흔적이 1㎝ 미만으로 얇게 파여 있다. 알 구멍은 굼, 성혈(性穴) 등이라고도 한다. 받침돌은 동서 2개만 남았는데 서쪽 받침돌의 ‘반공’과 ‘토암(土岩)’이라는 글자가 한자로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데, 언제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참조
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포천 문화원 홈페이지
 

시민기자 이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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